혜서..! 겨울은 한없이 깊어만 가고 당신을 향한 나의 그리움은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움이 깊으면 병이 된다고 했나요? 또 길을 떠납니다. 저 멀리 남쪽에 있는 덕유산으로... 환영처럼 회색 빛 겨울하늘에 당신의 얼굴이 비치는군요.
올 겨울엔 유난히 남쪽에 눈이 많이 내리는군요. 당신이 있는 곳에도 희디흰 그리움으로 눈이 내리나요?
오늘 눈 내리는 백두대간을 걸으며 얼마나 많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될까? 육십령으로 오르는 도로가 제설이 되지 않아 차가 더 이상 오르지 못해 모두 걸어갑니다. 눈이 소리 없이 고즈넉하고 푸근하게 내리는 길을 걷는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배낭이 무거워 땀이 흐릅니다.
육십령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모두들 더워서 겉옷을 벗는데 한바탕 웃음꽃이 피어나는군요. 겨울 산의 추위와 바람이 견디기 힘들어 고소내의(내복) 위에다 반소매 라운드 셔츠를 입었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을 내가 봐도 절로 웃음이 쿡 하고 나옵니다. 그러나 겨울 산에서의 추위와 바람, 배고픔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죠.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너무 포근하군요. 당신이 이런 나의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말을 할까?
짙은 구름과 안개, 쉼 없이 내리는 눈으로 산의 윤곽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도를 꺼내서 나침반을 고정시키고 방향을 잡고 길을 나섭니다. 이 겨울은 언제쯤 끝이 날까요? 그 겨울의 끝에 "상사화"가 피어나겠죠. 잎과 꽃이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인연, 어쩌면 당신과 나는 이 생에서는 만날 수 없는 운명의 인연은 아닌지. 더욱더 깊은 구름이 몰려오고 눈발이 굵어집니다.
모르는 척 슬며시 건너갈 수 있을까. / 내려놓은 배낭 위에 턱 괴고 앉아 / 지나가는 세월을 지켜본 적 있나요. / 8월이면 불같은 홍류(紅溜)가 피는 / 눈 내리는 사막에서 울어본 적 있나요.(김재진님의 시에서)"
할미봉으로 오르는 길이 무척 가파르군요. 모두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힙니다. 할미봉에 서서 사방을 돌아 봐도 보이는 것은 구름과 눈뿐입니다. 제법 거친 바람이 불어와 겨울산의 맛을 느끼게 합니다. 암릉 길이 험해서 내려오느라 안간힘을 쓰는군요.
기상특보가 내려서 산행을 할 수 없으니 중간에 하산을 하라고 하는군요. 내려가더라도 남덕유산까지는 가야합니다. 아직 갈 길이 멀군요. 어둠이 찾아오는 산길에 바람이 차갑게 불어와 체온을 빼앗고 일행들의 체력을 약하게 만듭니다.
능선에 눈이 더욱 깊게 쌓여 길 찾기가 쉽지 않군요. 나를 리더라고 따르는 일행들을 위해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남덕유산 갈림길에서 영각사로 하산하기로 하고 남덕유 정상을 향해 힘들게 오릅니다.
눈발이 조금 약해지고 옅은 구름 속에서 달빛이 새어나와 은빛의 적막한 겨울 산을 우리는 무엇을 찾아 이렇게 헤매는 걸까요?
포근히 눈을 뒤집어쓰고 어둠 속에 나란히 서있는 부도 탑을 보니 말입니다. 문득, "존재의 시원(始原)"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삶의 끝,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이겠죠.
"죽어서 나무와 풀과 흙과 바람과 물이 되는 것. 그날이 바로 내 생의 시작이겠지요.(이원규님의 글에서)"
일행들과 늦은 저녁을 먹습니다. 무사히 내려 왔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리고 땀이 식자 체온이 떨어집니다. 일행들에게 미안하군요. 제대로 된밥을 먹게 하지 못하고 어둡고 추운 곳에서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게 해서. 그러나 지나고 난 뒤 돌아보면 오늘의 시간들이 가슴 시린 아름다운으로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뒤 돌아보며 아쉬움과 그리운 상념에 빠집니다.
눈이 가늘게 내리고 쌓인 눈으로 어둡지 않아 손전등을 끄고 내려오는 길이 포근하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고향의 산길을 걷고 있는 느낌입니다.
민박집에 도착해서 소주 한잔으로 오를 하루를 정리합니다. 너무 피곤해서 침낭 속에 들어가자마자 곧 바로 잠이 들었습니다.(아침에 일어나니 내가 코를 골았다고 일행들이 즐거운 푸념을 합니다)
꿈속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었는데 당신은 오지 않았어요. 당신을 찾아 배낭을 메고 다시 길을 떠나야겠군요. 2002.01.28 덕유산 다녀와서... |
